7월 8일(수)은 돌아가신 장모님 49재 날이었다.
뇌졸중으로 쓰러지시기 전 장모님께서 불공을 드리기 위해 자주 찾으셨던 예천 장안사에 위패를 모시고 49재를 지냈다.
장모님은 72세 되시던 해 초에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뒤 8순을 맞으신 올해 돌아가셨다. 다친 육신에 갇힌 채로 8년 반이라는 세월이 지나는 동안 영혼은 얼마나 힘들고 답답하셨을까...
다행히도 자식들 효성이 지극했기에 병석에서도 외롭지 않게 계시다 하늘나라로 가셨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영원한 이별 속에서도 크게 아쉬웠던 점은 큰 처남을 빼고는 자식들이 장모님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내 경우엔 회사에서 점심시간에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고 가족과 서둘러 내려갔지만 병원 근처에 갔을 때는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 30분 가량 늦어 임종을 못 지킨 것이다.
맏사위인 내게 한없는 사랑을 보내주셨던 장모님, 이제는 좋은 곳에 가셔서 편하게 지내시기를 빌고 또 빕니다.
아래는 장례를 치르고 난 뒤 조위를 해주신 분들게 보내드린 답례글이다. 장모님이 어떤 생을 사셨는지를 사위의 시각으로 짧게나마 그려 봤다.
따듯한 조위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보내주신 위로와 후의에 힘입어 돌아가신 장모님을 경북 예천 선영에 잘 모셨습니다.
장모님께서는 2012년 초 뇌졸중으로 쓰러지셨습니다. 그 뒤 8년 넘게 병석에 매여 계시다가 마지막 순간에는 너무도 급히 저희 곁을 떠나시는 바람에 따뜻한 손을 잡아 드리지 못했습니다.
장모님께서는 친지와 가족에게 한없이 자애롭고 어려운 이웃들에게는 늘 따뜻한 분이셨습니다.
당신과 비슷한 연령대인 시동생들은 형수를 마치 어머니 대하듯 의지하고 받들었습니다. 서울과 부산에 사는 장성한 조카들도 수시로 큰집에 내려와 대문 밖에서 부터 ‘큰엄마’를 소리쳐 부르며 달려가 와락 안기곤 했습니다. 성의라며 작은 것이라도 챙겨든 동네 이웃들의 발길도 끊이질 않았습니다.
공직에 계시며 집안일은 거의 돌보지 못하셨던 장인어른을 대신해 집안과 주위의 대소사를 챙기며 가지신 것 이상을 늘 베푸셨던 장모님께 가족과 이웃들은 그렇게 보답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 분이셨는데 칠순을 갓 넘기신 연세에 쓰러지셔서 오랜 기간 모진 시련을 겪은 뒤 하늘나라로 떠나셨습니다. 착한 분들은 대개가 화를 본인 가슴속에만 쌓아 두기 때문에 나쁜 병이 더 쉽게 그리고 빨리 찾아드는 것 같습니다.
저희 자식들은 장모님의 유지를 받들어 가족의 우애를 큰 자랑으로 이어가기로 다짐했습니다. 이웃에 대한 배려도 빠뜨리지 않겠습니다.
따뜻한 위로에 다시 한번 머리 숙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ㅇㅇㅇ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