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6일(수)
양력으로 오늘은 25년 전 어머니가 여든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나신 날이다. 며칠전 음력으로 정한 기일에 맞춰 제사를 지냈지만, 오늘이 되니 당시 기억들이 떠오르며 종일 마음이 흔들렸다.
어머니는 췌장암 진단을 받고 4개월 만에 돌아가셨다. 평소 약한 당뇨가 있었지만 식단과 운동 등으로 관리를 잘 하셨는데 중완(中脘 명치 아래쪽 부위) 쯤에 심한 통증이 반복돼 병원에 가셨다가 말기암 진단을 받으셨다.
당시는 팔순잔치를 내 손으로 성대하게 차려드려야겠다고 마음먹고 장소를 알아보던 중이었다. 잔치 계획은 병원진단이 나오면서 자연히 물거품이 됐다.
췌장암은 조기 발견이 대단히 어렵고 통증이 극심해 암 중에서 가장 고약한 암으로 알려져 있다.
오래 전부터 당뇨병의 추적 관찰을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동네 내과의원에서 꾸준히 정기 검진을 받아 오셨는데 의사는 매번 당뇨관리 잘 하고 계시다는 얘기만 하곤 했다. 그런데 강남 성모병원서 받은 1차 검사에서 췌장암이 바로 발견됐다. 그것도 말기로...
병원에서는 통증관리를 위한 제한된 조치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고, 그것도 시간이 지날수록 어려워 진다고 했다. 며칠 지나자 퇴원을 종용하기까지 했다. 치료는 커녕 생명 연장까지 바랄 수도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고통만은 덜어드리고 싶었다.
양방에선 방법이 없다고 했으니 한방과 대체의학 쪽으로 수소문을 했다. 지인으로부터 대체의학 전문가를 소개받아 면담까지 마쳤다. 하지만 큰형님의 반대에 부딪혀 아무 것도 해드릴 수 없었다.
아내가 대체의학 전문가로부터 처방 받은 약을 어머니께 드렸는데, 어머니는 "네 형이 알면 불벼락이 내리고 집안이 시끄러워 진다"시면서 드시지 않았다.
장인어른께서 보내주신 동충하초도 달여 드리지 못했다. 당시는 동충하초가 항암치료에 상당한 효과가 있는 것으로 화제에 오르내리던 때였다.
집안에서 결정적인 권한을 행사하는 맏이가 반대하니 막내인 나는 손발이 꽁꽁 묶였다. 한자락의 희망조차 찾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속만 타들어 갔다.
그런 와중에 어머니는 병실에서 생신을 맞이 하셨다.
나는 그 날 단 하루 만이라도 집으로 모셔 온 가족과 함께 따뜻한 진지 한끼 올리고 편안하게 하룻밤 주무게 해드리고 싶었다. 아내와 상의한 뒤에 주치의에게 이런 사정을 설명했더니 바로 외출승인을 해줬다.
당시는 분양받은 마포의 서강LG아파트에 갓 입주한 상태였다. 새집에 먼저 다녀가신 아버지께서 "집이 참 좋더라. 당신도 어서 가봐야지"라는 말씀을 병실에 계신 어머니께 하셨다. 그렇지 않아도 막내아들이 처음으로 갖게 된 새집을 몹시 궁금해 하시던 차였는데 아버지 말씀을 듣고는 더욱 가보시고 싶어 하셨다. 나도 더 편찮으시기 전에 꼭 보여 드리고 싶었다.
비록 팔순잔치를 열지는 못하게 됐지만, 집으로 모셔 생신상을 차려 드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되니 나도 조바심이 났다.
집으로 모시고 가는 차안에서는 힘들어 하셨지만, 집안에 들어서시자 표정이 밝아지면서 얼마나 기뻐하시던지...
아버지와 함께 하룻밤을 집에서 주무셨다. 이튿날 오후에 병원으로 다시 모셔다 드리는데 현관을 나서시면서 "집이 참 좋구나. 애들 잘 키우고 행복하게 살아라"는 말씀을 하셨다. 머지 않아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던 어머니는 절망의 한가운데서도 자식의 행복과 앞날 만을 염려해 주셨다. 어머니의 그런 사랑의 크기와 깊이를 나는 지금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내가 뭐라도 해드리겠다는 걸 왜 그렇게 막아야 했는지 지금도 야속하기만 하다. 자식들이 한뜻으로 최선을 다해 어머니의 마지막을 보살펴 드렸다면 시시각각 밀려오는 공포와 고통을 조금은 떨쳐 버리실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나는 지금도 당시 상황이 용서가 안 된다. 병원으로부터의 절망적인 진단을 부모가 아닌 자식이 받는 경우, 어떤 노력이나 시도도 해보지 않을 부모가 세상에 있을까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렇게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한 채 어머니를 보내 드릴 수밖에 없었고, 그 아픔은 여태 회한과 원망으로 남아 있다.
그 때 팔순 잔칫상을 내손으로 차려드리고 어머니가 기뻐하시는 모습을 봤더라면 지금까지 겪고 있는 이 슬픔의 무게가 조금은 덜어졌을까?
어머니는 병상에서 췌장암의 통증 정도에 대해 “생살을 칼로 도려내는 듯하다”고 말씀하셨다. 가장 강력한 수준의 마약성 진통제도, 신경절제술도 그 통증을 덜어주지 못했다.
부모님 생각을 하면 지금도 목이 메고 눈물이 쏟아진다. 어머니 생각을 하면 더 그렇다. 이 글을 쓰는 중에도 그렇다.
돌아가시던 날 새벽, 의사가 와서 “지금 약물로 생명을 유지하고 계신데 자식들이 모일 때까지 기다릴지 바로 보내드릴지 결정을 하라”고 했다.
위독하시다고 해서 전날 올라왔던 다른 형제들은 낮에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 상태였다. 나와 아내, 셋째 누나만 남아 있었다. 나는 형제들에게 전화로 의사의 얘기를 전하며 “고통의 시간을 한시라도 연장시켜 드리는 건 불효라고 본다. 그러니 이제는 편안한 곳으로 보내드리는 게 좋겠다”고 내 생각을 덧붙였다.
모든 형제들이 내 생각에 동의해 줬다. 바로 의사에게 연락해 1인실로 모시고 가서 어머니 몸에 붙여 놓았던 생명유지장치를 떼고 임종을 맞았다.
단 한 번도 자식에게 화를 내거나 모진 말씀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던 어머니. 한없이 자애로우셨고 늘 자식 잘 되기만 바라시며 평생을 헌신하셨던 내 어머니가 그렇게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당시 내 나이는 37살.
돌아가신 뒤 장례식장에서는 눈물이 한 방울도 나지 않았다. 그런 나를 보고 누나들이 걱정했다. 마음껏 울어야 슬픔도 덜해진다고들 했다. 그러니 참지 말고 울라고...
나는 눈물로 애써 슬픔을 달래고 싶지도 않았지만, 실제로 슬프지가 않았다. 고통에서 벗어나 편안하게 잠드신 듯한 모습에 오히려 내 마음도 편해졌기 때문이다.
발인하는 날 새벽에야 어머니 영정 아래 엎드리니 눈물이 쏟아졌다. 오늘 산소에 모시면 영정이 아니면 다시는 뵐 수가 없다고 생각하니 영원한 이별이 그제야 실감됐고 신음에 가까운 울음까지 나왔다.
어릴 때부터 튼실하지 못했던 자식이라 늘 걱정만 끼쳐 드렸는데 너무도 빨리 허망하게 내곁을 떠나셨다. "아버지 돌아가시면 너희집에서 함께 살자"고 말씀하시곤 했는데 뇌졸중으로 건강이 좋지 않으셨던 아버지보다 2년 반을 앞서 가셨다.
무엇 하나 제대로 해드린 것이 없으니, 지금껏 회한만 가득하고 세월이 흘러도 슬픔이 줄어들지 않는 것 같다. 아직도 부모님 얘기를 하려면 가슴이 저려오며 말을 잇기가 힘들다.
<부모님 제사는 내가 모시고 싶다>
지난 1월에 큰형님이 돌아가신 뒤 형수님께 부모님 제사는 올해부터는 내가 모시겠다고 말씀드렸다.
조상 제사는 장자, 장손으로 내려가는 게 관례라고들 하지만, 지차라도 남은 자식이 있으면, 그 자식이 부모 제사를 모시는 게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내도 내 생각에 적극 동의해 줬다.
본인이 모시겠다고 몇 차례 고집하시던 형수님은 내 뜻이 확고하다는 걸 아시고는 올해까지는 모시겠으니 내년부터 내 생각대로 하라고 뜻을 굽히셨다.
착한 형수님도 이제는 편히 쉬셔야 할 연세다.
앞으로 내가 가고 나면 내 부모님 제사는 안 지내게 될 것이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아빠, 엄마 제사는 지내지 말라고 이미 얘기해 뒀다. 그냥 넘어가기 섭섭하면 형제들이 고급 식당에 모여 맛난 음식을 먹으며 부모 생전에 좋았던 추억만을 떠올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라고 당부했다. 아내도 같은 생각이다.
나는 부모님 제사 모시는 것을 의무가 아닌 권리로 생각하기에 모시려 한다.
<지금과 같은 제례 관습은 언제 시작됐나?>
조선시대 중기까지는 기제사를 관리 집안은 3대, 평민은 2대, 상민은 1대 모셨는데, 후기로 가면서 4대 봉사가 기본이 됐다고 한다.
또 출가한 딸을 포함해 자녀들이 돌아가면서 모시는 윤회봉사를 했고, 유산도 모든 자녀에게 균등 상속됐다고 한다.
종손이나 장자 중심으로 제사가 대물림되는 관습은 조선 후기가 돼서야 시작돼 지금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관습과 관련해 전에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 교수와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 교수는,
“조선초기에는 아들, 딸 차별 없이 유산이 균등 상속 됐고 제사는 출가한 딸까지 포함해 돌아가면서 모셨다.
양반의 지위와 권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규모 이상의 재산과 노비가 있어야 했는데, 균등 상속으로 재산을 쪼개다 보니 후손들이 물려받는 재산이 점점 줄어 한 가문이 양반으로서 권세를 유지하기 어려운 지경이 됐다.
가문 차원에서 이같은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종손과 장자 우선 원칙 그리고 출가한 딸의 상속 배제 등과 같은 방법이 조선 중기 이후 해결책으로 나왔고 이후 관습으로 굳어져 내려왔다”고 했다.
중국은 주나라 때 만들어진 종법을 통해 부계 적장자 중심의 문화가 오래 전부터 광범위하게 자리잡아 왔지만,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았다. 고려시대까지는 부계와 모계, 장자와 차자, 아들과 딸이 동등한 지위를 누리는 문화였다. 이후 조선이 건국한 뒤 유교를 국가의 근본이념으로 내세우고 주자가례를 시행했지만, 민간에서는 이를 바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이어져 온 부계의 종가와 종손 중심 문화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조선중기 이후가 돼서야 지배계층의 필요에 의해 퍼지게 된 것이다.
그러니 종손, 장자 중심의 제례문화는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다. 모든 관습은 사회상이 반영돼 시작된 일들이 세월 속에서 변화를 겪으며 자리잡는 것이다.
상속법에서도 딸, 아들 차별 없이 균등 상속권을 보장하고 있고, 교육혜택도 차별을 두지 않는 것이 지금의 문화다. 상속 문제로만 국한하자면 조선 초기 문화와 많이 같아졌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생겨난 부모제사를 모실 권리가 장자, 장손에게만 있다는 걸 여전히 고집할 필요가 있을까?
부모님 제사를 모시고 싶어 하는 자식이 있다면 마땅히 그 자식이 모시는 게 맞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