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Old South Meeting House
56m 높이의 첨탑이 있는 교회다. Boston Tea Party가 촉발된 곳으로, 1773년 당시 5천여 명의 시민들이 이곳에 모여 영국의 조세정책을 성토한 다음 근처에 있던 차 운반선을 습격했다.
1729년에 완공되었으며 당시엔 보스톤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
1770년 보스톤 대학살 이후부터 1775년까지 존 행콕, 조셉 워런 박사 같은 뛰어난 웅변가들이 매년 이 교회에서 기념행사를 열었다.
영국군이 이 Meeting House를 독립전쟁과 관련이 있다며 1775년 점령한 뒤, 내부를 훼손하고 흙을 채운 다음 실내 승마 연습장으로 활용했다. 이 때 많은 물건들이 도난됐다고 한다.
(9) Old State House
신대륙에서 최초로 선출된 의회가 활동을 시작한 곳이다.
보스톤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공공 건물로, 워싱턴 St.와 스테이트 St.의 교차로에 있다.
지금은 보스톤 소사이어티가 사용하고 있으며, 프리덤 트레일을 따라 둘러 볼 수 있는 많은 역사 유적지 중의 한 곳이다.
현재의 벽돌 건물은 1712년 세워진 것이고, 1657년에 세워졌던 목조건물은 1711년 소실됐다.
이 건물은 1747년에도 화재를 겪었다. 다행스럽게도 벽돌로 건축된 벽체가 그대로 남아 이듬해인 1748년 내부공사만으로 복구가 가능했다.
1776년 7월 18일 1시, 토마스 크래프츠 대령이 이 건물의 동쪽 발코니에 서서 환호하는 군중을 향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선언서 낭독이 끝나자 시민들이 나서 지붕 양쪽에 있던 나무로 된 대영제국의 상징인 사자와 유니콘상을 끌어내려 King St.의 모닥불 속으로 던졌다고 한다.
독립전쟁 후부터 1798년까지 주 정부가 이 건물을 청사로 사용했다.
1904년까지 건물의 지하 일부가 지하철역으로 사용되다가 1907년에 복구됐다.
(10) Site of the Boston Massacre
'보스톤 학살' 사건은 1770년 3월 5일, 보스톤에서 식민지 시민들이 모여 영국에 맞서 시위를 하던 중 5명이 사살된 사건을 말한다.
영국인들은 이 사건을 '보스톤 소요사태'라고 불렀다.
Old State House 앞의 교통 안전지대 위에 이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가 원형 조약돌들로 표시돼 있다.
당시 영국의회는 "영국이 식민지 세금 부과권을 갖는다"는 내용을 담은 Townshend 법을 제정했다. 이는 무역규제를 통해 식민지 시민을 굴복시키기 위한 목적이었다.
영국은 이 법을 강행하기 위해 1768년 보스톤에 군대를 파견했다. 예상했던대로 당시 식민지 시민들은 이 법안에 크게 반발했고, 그 저항의 중심지가 바로 보스톤이었다.
중무장한 영국군대와 시민 사이의 팽팽한 긴장이 시위 군중을 향한 발포로 이어졌다. 이 발포로 3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11명이 부상했다. 며칠뒤 부상자 중에서 두 명이 사망했다.
바로 '보스톤 학살' 사건이다.
이 사건은 영국군 휴 화이트 일병이 보초를 서고 있던 킹 스트리트(현재 State St.)에서 일어났다.
어린 가발 견습공 에드워드 게리쉬가 외상을 갚으라며 존 골드핀치라는 영국군 대위를 밖으로 나오라고 불렀다. 하지만, 갚을 외상이 없다고 생각했던 대위는 그것을 무시했다. 게리쉬는 그냥 돌아갔다가 몇 시간 후에 친구들을 데리고 다시 돌아와 항의를 했고, 그 때 모여든 시민들이 골드핀치에게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 때 게리쉬와 서로 욕설을 주고받던 화이트 일병이 근무 중이던 초소에서 나와 소총 개머리판으로 게리쉬를 가격했다. 고통을 못 이긴 게리쉬가 울음을 터뜨리자 옆에 있었던 그의 친구들이 화이트 일병에게 항의를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흥분한 시민들의 위협 강도가 갈수록 높아지자, 화이트 일병은 초소를 벗어나 문이 닫힌 세관 건물의 계단으로 물러났다.
이 광경을 일직장교 토마스 프레스톤 대위가 근처 정문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화이트 일병이 위험에 처했다고 판단한 그는 구출대로 하사관 1명과 7~8명의 병사를 착검 상태로 출동시켰다.
구출대가 세관 건물에서 화이트 일병을 만났을 당시, 반원형으로 이들을 둘러싸고 압박하던 시위군중은 300~400명 정도였다.
시위군중은 군인들을 향해 야유를 보내면서 눈덩이와 갖고 있던 물건들을 던졌다. 이 때 술집 주인이 휘두른 클럽에 맞아 휴 몽고메리 일병이 쓰러졌다. 일어나기 위해 몸을 추스르던 휴 몽고메리 일병이 실수로 총을 발사하고 말았다.(당시 프레스톤 대위는 병사들과 시위대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발사명령을 내리지는 않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자 군중 속에서 비아냥대듯이 ‘발사’라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에 병사들이 군중을 향해 발포하기 시작했다.
이 충돌로 11명이 죽거나 다쳤다. 3명은 현장에서 즉사하고 도탄(튕긴 탄환)에 맞은 7살 어린이가 수 시간 후에 사망했다. 다른 한 명은 2주 후에 사망했다.
이튿날 영국 왕실은 질서 회복 조치로 도심에 있던 모든 군대를 보스톤항에 있는 캐슬 아일랜드 요새로 철수시켰다.
3월 27일엔 발포에 가담했던 27명의 군인들이 살인죄로 기소됐다. 프레스톤 대위와 병사들이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소송은 매사추세츠주 내의 서포크 카운티 법정에서 진행됐다.
그러나 한 가지 큰 문제가 발생했다. 보스톤 지역에는 이 병사들을 도와주려는 변호사가 없다는 점이었다.
절망에 빠진 프레스톤 대위는 변호사로 개업 중이던 존 애덤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렇게 해서 조슈아 퀸시 2세, 로버트 오크뮤티 등과 함께 존 애덤스가 피고인들의 변호를 맡게 됐다.
보스톤 당국은 메사추세츠주 법무차관 새뮤얼 퀸시와 변호사 로버트 페인을 시켜 군인들을 기소토록 했다.
흥분이 진정되기를 기다리느라 소송은 수 개월 지연됐다. 배심원들은 모두 보스톤 시외에 거주하는 사람들 중에서 엄선됐다.
배심원들이 프레스톤이 발포명령을 내리지 않았다고 판단했고 그는 바로 석방됐다. 프레스톤에 대한 소송은 1770년 10월 24일부터 30일까지 진행됐다.
병사들에 대한 소송은 1770년 11월 27일 열렸다.
변호사 존 애덤스는 불량 소년들, 흑인들, 흑백혼혈인들, 아일랜드인들, 거친 이방인들이 군중을 선동하는 바람에 병사들이 위험에 빠졌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에게는 맞서 싸울 권리가 있기 때문에 당연히 무죄이며, 기껏해야 과실치사라고 변론했다.
배심원들은 애덤스의 이 같은 주장에 동의했고 6명의 병사들이 석방됐다.
병사들 중에서 군중을 향해 직접 발포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드러난 2명은 살인죄를 적용받았다. 하지만 애덤스는 초범 감경(‘Benefit of clergy’, 영국법에서 유래한 것으로, 원래 성직자는 세속의 법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원칙을 들어 그들에게 과실치사죄를 적용해 줄 것을 호소했다.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여 2명의 병사에게 과실치사죄를 적용, 손가락에 낙인을 찍는 형벌을 내렸다.
이 보스톤 대학살 장소는 아래 사진과 같이 Old State House 앞의 교통 안전지대에 둥글게 돌들을 깔아 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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