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 기세가 한 풀 꺽이자 아침, 저녁으로 기온 변화가 느껴지는 요즘이다. 한낮의 더위를 더욱 뜨겁게 달궈대던 매미 울음소리가 이제는 ’(여름아)가지마, 가지마‘라고 외치는 걸로 들릴 정도니 말이다. 과연 끝날까 하는 염려가 들 정도로 지독했던 폭염도 시간의 너울을 타고 오는 계절 변화 앞에선 어쩔 수가 없나 보다.
8월 14일(토), 서후리를 2주 만에야 찾았다. 지난 주말은 2년간 부산 근무를 하게 된 아내를 도와 이사를 하느라 서후리행을 거를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부산 근무기간 동안 금요일 저녁에 올라왔다가 월요일 새벽 비행기로 내려가는 생활을 이어가겠다고 한다. 이제 별거생활 1주일이 됐다.
한 주를 건너뛰었을 뿐인데도 서후리엔 아주 오랜만에 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집터 여기저기엔 잡초들이 또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누렇게 늙은 맷돌호박 여러 통이 여기저기 땅 위에 누워 있고, 어른 장딴지만하게 커버린 애호박들도 함께 늙어 있었다. 제대로 크기 전에 먹는 호박이라고 해서 ’애호박‘이라는 이름이 붙었나 본데 수확시기를 놓쳐 늙어버렸으니 이를 ’늙은 애호박‘이라고 불러야 할지... 맷돌호박과 애호박 모두 한줄기에 이미 늙어버린 호박과 이제 막 꽃을 맺는 호박들이 함께 매달려 있다. 호박에겐 번식을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겠지만 사람에겐 오래도록 호박을 따먹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언제까지 그리고 얼마나 열매를 키울지 당분간은 지켜봐야겠다.
지난번에 봤을 때 지나치게 얽혀있는 넝쿨이 오히려 안 좋다고 생각돼 정리해 준 수박은 남겨뒀던 잎들이 그새 모두 시들어 버리고 헐벗은 줄기에 수박만 덩그라니 매달려 있다. 초보 농부의 잘못된 판단이 결실에 마지막 에너지를 부어야 하는 수박을 너무 애처롭게 만든 것 같다. 노각으로 딴다고 일부러 여러 개를 따지 않고 늙힌 오이는 몇 개가 줄기에 매달린 채 썩어 버렸다.
텃밭 울타리 입구엔 수능리 친구가 두고 간 퇴비 두 포대가 놓여 있었다. 배추씨 파종하는데 복합비료가 필요하다길래 지난 봄에 사두었던 걸 갖다 쓰라고 했더니, 집에 남아 있는 거라며 가져온 것이다. 가을철 배추와 무 파종에 쓰면 될 것이다.
아내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 고추와 깻닢, 토마토 등을 수확하고 나는 잡초를 뽑는 일을 했다.
아무리 환절기가 시작됐다고 하지만 햇볕은 여전히 따가웠다. 땀 흘리며 열심히 몸을 놀리고 있는데 숲 쪽에서 갑작스럽게 돌풍이 불어왔다. 너무 시원해 고개를 들어 보니 바람이 나무에서 훑어낸 낙옆들로 허공에 그림까지 그리고 있었다. 낙옆이 지기엔 터무니없이 이른 절기이니, 그동안 폭염에 지쳐 힘을 잃었던 나뭇잎들이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견디질 못하고 줄기와 잡고 있던 손을 놓치며 벌어진 일인가 보다.
아내는 수확을 마친 뒤 상춧대를 뽑고 당근을 솎아내 옮겨 심는 것까지, 나는 잡초를 뽑아 소나무와 단풍나무 밑둥치에 깔아주고 블루베리에 물을 주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 했다.
숲속 쉼터에 들어가 사온 김밥으로 허기를 때우던 중 수능리 친구가 건너왔다. 친구의 도움을 받아 가장 키가 큰 공작단풍나무 꼭대기에서 움을 틔우고 자라난 청단풍 대목의 가지를 잘라줬다. 너무 높아 손이 닿지 않는 곳이라 그동안 바라볼 수밖에 없었는데 T자형 배수파이프 연결구를 손수레 위에 올려 놓고 친구가 그걸 잡아준 덕분에 그 위에 올라가 톱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공작단풍은 보통 청단풍 대목에 공작단풍순을 접목해 키운 것이라 대목에서 나온 청단풍 우세순을 방치하면 열세인 공작단풍을 덮어버린다고 한다.
모두 네 덩이가 달린 수박 중에 오늘 처음으로 가장 큰 것을 한 개 땄다. 잘 익었을 거라고 자신할 수 없었지만 수확을 미뤘다가 때를 놓치면 너무 익어 썩을 염려도 있다. 열매를 맺은 지 두 달가량 돼서 충분히 익었을 것 같았고 두드렸을 때 나는 소리도 좋았다.
집에 돌아와 온 식구가 모여 잘 익었기를 기도하며 수박을 잘랐는데 아주 제대로 익어 있었다. 설탕수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달고 맛이 좋았다. 늦은 시각이었지만 친구에게 바로 전화를 해서 남아 있는 것 중에 가장 큰 걸 따가라고 권했다.
텃밭농사라는 게 양평까지 오가는데 드는 비용과 시간을 생각하면 사먹는 게 더 경제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밭을 가꾸며 느끼는 재미와 만족감, 주변 친지들과 나누며 느끼는 보람은 몸이 고되고 비용이 더 드는 걸 훨씬 뛰어 넘는다. 이 즐거움이 어느 날 게으름에 치이거나 다른 이유로 꺽이는 일 없이 계속 이어지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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