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여행

보스톤 프리덤트레일 - 벙커힐 전투와 기념비

주홍완 2011. 5. 29. 21:05

(15) Bunker Hill Monument

독립전쟁 기간 동안 영국군과 독립군 사이에 일어난 첫 번째 대규모 전투였던 ‘벙커힐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1843년 화강암으로 건립된 오벨리스크형 기념비다.

높이 67m(221Ft)에 꼭대기까지 294개의 계단이 있는 이 기념비는 벙커힐이 아니라, ‘벙커힐 전투’의 실제 전투 대부분이 일어났던 Breed's Hill에 세워졌다.

 

1794년에 처음 세워진 기념비는 5.5m 높이의 나무기둥으로, 꼭대기에 반짝이는 항아리가 올려진 모양이었다.

 

지금의 기념비는 370만 달러를 들여 리노베이션을 마친 다음 2007년 4월 2일 재개장된 것이다. 길 건너편에는 벙커힐 박물관이 있다.

 

<벙커힐 전투>

독립전쟁 중이던 1775년 6월 17일 일어난 전투다.

 

렉싱턴 & 콩코드 전투 이후 식민지(미국) 군대는 1만5천명의 민병대로 보스톤을 포위하고 있었다. 그들은 6월 13일, 영국군이 보스턴 주변의 고지들을 점령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보스톤 시내를 점령하고 있던 6천여 명의 영국군이 외부로부터 보급을 받으려면 반드시 이 고지들을 통과해야만 강과 연결이 됐다. 식민지 군대는 이를 막기 위해 윌리엄 프레스콧의 지휘 하에 있던 병력 1천500명을 은밀하게 보냈다. 그들은 벙커힐(34m)과 브리즈힐을 먼저 점령했다. 그런 다음 브리즈힐(19m)에 흙으로 보루를 쌓고 찰스타운 반도를 가로지르는 참호선을 구축했다.

 

다음날 이 사실을 눈치 챈 영국군이 공격을 시작했다. 영국군은 식민지군의 방어선을 두 차례 공격했지만 많은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다.

 

전투에서는 식민지 군대가 이겼지만 영국군의 연이은 세 번째 공격을 막아내다가 탄약이 바닥나고 말았다. 이 때문에 보루를 방어하던 식민지 군대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영국군은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많은 숫자의 장교들이 포함된 부상 828명, 전사 226명이라는 큰 손실을 입고 말았다.

 

이 전투는 ‘피로스의 승리’의 전형으로 알려져 있다. 목표는 점령했지만, 많은 병력을 잃고도 포위상태를 뚫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사상자 규모는 독립전쟁 기간 동안 영국군이 단일 전투에서 기록한 가장 큰 손실이었다.

 

그 사이, 전사자 140명을 포함해 450명이라는 상대적으로 적은 사상자를 낸 식민지 군대는 캠브리지로 퇴각해 부대를 재편할 수 있었다.

 

경험이 없었던 식민지 군대는 이 전투를 통해 정규군에 맞서 싸워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대륙군 사령관으로 부임하기 위해 보스톤으로 가던 조지 워싱턴 장군은 뉴욕에서 이 소식을 들은 뒤 비로소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