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생활을 꿈꾸다

벌들아, 미안해!!

주홍완 2021. 7. 3. 23:45

전봇대 배전함 뒤에 집을 지은 땡벌들을 처리하기 위해 양수역 앞 편의점에 들러 에프킬러 한 통을 샀다.

 

갈 때마다 수도 모터를 가동하기 위해 전기 스위치를 올리고 내려야 하는데 그 스위치가 들어있는 배전함 바로 뒤에 벌집이 들어섰으니 언제든 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 됐다. 벌집을 떼어 다른 곳으로 옮기는 방법도 있겠으나 그렇게 하려면 양봉인 수준의 보호장구를 갖춰야 한다. 그러는 게 현실적으로 어려우니 에프킬러로 벌집을 정리하는 수밖에 없다고 안타까운 판단을 했다.

 

벌집을 들여다보니 지난주보다 집이 조금 더 커진 듯했고 벌 몇 마리가 겉에 앉아 있었다. 고통을 느낄 새도 없도록 해주는 것이 그나마 내가 해줄 수 있는 배려라고 생각하고 벌집을 향해 에프킬러를 맹렬히 분사했다. 벌들은 한 마리도 날아오르지 못한 채 순식간에 죽었다. 침입자인 내가 이곳의 주인들에게 다시 한 번 못할 짓을 한 것이다. 참으로 안타깝고 미안한 일이다. 토목공사를 시작하고 벌목을 할 때 잘리는 나무들을 보며 들었던 것과 같은 심정이다. 

 

배전함 뒤 벌집에 에프킬러를 뿌린 후의 모습

시골서 자란 나는 어린 시절에 벌집 부수는 걸 놀이로 많이 즐겼다. 벌집 부수는 놀이는 ‘소뜯기기(소에게 풀 뜯기기)’ 중에 많이 일어났다. 그 시절 소뜯기기는 거의 아이들 몫이었다, 어른들은 더 힘들고 어려운 농삿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읍내 있는 학교까지 3Km 가량을 산길 또는 신작로로 걸어 다녔는데, 방과 후 친구들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그날 소뜯기러 갈 장소가 정해졌다.

 

소뜯길 장소는 산 아니면 냇가였다. 냇가로 가게 되면 제방에 소들을 풀어 놓은 뒤 친구들과 멱감기, 고기잡기, 축구 등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무 뽕나무밭에나 들어가 오디를 따먹거나 개구리잡기도 하며 놀았다. 산으로 가면 완만한 지형의 초지대를 찾아 소를 풀어 놓고 총싸움을 하며 놀았다.

 

소들은 고삐가 풀린 산태였지만 멀리가지는 않고 아이들 주변에서 맛있는 풀을 찾아 뜯었다. 해거름이 될 때까지 세 시간가량 쉼 없이 풀을 뜯고 나면 소들은 배가 불룩해 졌고 열심히 뛰어 논 아이들은 배가 홀쭉해졌다.

 

그렇게 놀다가 누군가 벌집을 발견하면 왜 그랬는지 꼭 부숴야 했다. 벌집부수기는 그 시절 아이들의 모험심을 자극하는 몇 안 되는 놀이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냇가에 사는 벌들은 제방 경사면에 쌓아 놓은 경칫돌 틈새에 집을 짓고, 산에 사는 벌들은 나뭇가지나 돌 틈, 땅속 등에 집을 짓는다.

 

집을 드나드는 벌들은 시골 아이들 눈에 쉽게 띄었다. 누군가 “저기 벌집이다”라고 소리치며 손으로 가리키면 그 때까지 진행 중이던 다른 놀이는 바로 중단됐다. 나뭇가지를 꺽어 드는 녀석, 고무신짝을 벗어 손에 쥐는 녀석 등... 각자가 자신에 맞는 무기를 갖춘 아이들에 의해 벌집부수기가 시작됐다.

 

그 중에 가장 용감한 녀석이 벌집(구멍) 옆에 다가가 벗어든 고무신짝으로 드나드는 벌들을 때려잡는 일을 맡았다. 그 틈을 비집고 나온 벌들을 옆에서 나뭇가지를 휘둘러 때려잡는 친구도 있다.

 

벌들이 떼로 나와 공격을 하게 되면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도망가야 했다. 그런데 아무리 빨리 달린다고 해도 아이들 걸음으로는 날아드는 벌들을 따돌릴 수는 없다. 그래서 벌집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는 대로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야 했다. 가장 낮은 자세를 취하고 움직임을 멈추면 쫒아온 벌들은 위에서 맴돌다 돌아간다. 납작 엎드려 꼼짝하지 않는 것이 벌의 공격을 피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벌과의 싸움은 언제나 아이들 승리로 끝났다. 벌들은 목숨과 집을 잃었고 아이들 중 한 두 명은 벌침에 쏘였다. 벌에 쏘인 자리는 금세 부어올랐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집에 가서 된장을 바르는 게 치료의 전부였다.

 

그 시절엔 개구리, 새, 곤충들을 잡고 죽이는 게 시골 아이들의 일상적인 놀이였다. 지금 돌이켜 보면 아주 잔인한 일이고 하지 말았어야 할 행동이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고 별다른 장남감도 없었기 때문인 것도 한 이유였으리라. 읍내 사는 아이들과 다르게 자연 속에서 뛰어다니며 자라다 보니 그랬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다른 생명을 해치면서도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해 보면 끔찍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가끔 어린 시절 그런 일들을 생각할 때면 당시에 내게 피해를 당한 생명들에게 그저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은이 든다.

 

오늘 벌집을 부순 일은 안전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자위를 해보지만 마음이 영 개운치 않다.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이런 일을 겪어야 할지 모르겠다. 전원생활을 하려면 피할 수 없는 일일까?

 

오늘은 친정에 다녀오겠다는 아내와 떨어져 혼자 양평에 가서 채소를 수확했다. 제법 큰 애호박과 오이, 고추를 땄다. 호박과 수박에 거름도 주고 풀도 뽑았다. 초봄에 갑자기 기온이 떨어지며 동해를 입었던 공작단풍 한그루에 이젠 제법 잎이 돋아났다. 그 강인한 생명력이 경이로롭고, 살아나 줘서 고맙다.

 

새로 잎을 내며 동해로부터 벗어나고 있는 공작단풍

해가 구름에 가려 뙤약볕도 없고 바람까지 불어주니 의자에 앉아 주변 경치를 감상하며 새소리를 듣기에 좋은 날씨였다. 예보를 확인하니 중부지방에 오후부터 내린다던 비는 아직 남부지방에서 올라오는 중이라고 했다.

 

건축이 끝난 수능리 친구집에 가서 마당에 깔기 위해 들여 놓은 마사토를 고루 펴는 일을 도와주려던 계획은 접었다. 어제 통화에서 비가 오더라도 일을 해야 한다는 친구 얘기를 듣고, 오전에 서후리서 내 일을 끝내고 수능리로 건너가 거들어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판초우의까지 준비해 온 길이었다.

 

그런데 오전 근무를 마치고 온다던 친구는 2시에나 회사를 나설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목동 회사에서 그 시각에 출발하면 토요일 오후라 수능리에는 4시 가까이는 돼야 도착할 거라고 했다.  그 시각에 도착해서는 저물기 전에 일다운 일을 하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친구는 걱정하지 말고 돌아가라고 권했다. 곧 비가 쏟아진다면 네 시간 가까이 친구를 기다릴 장소도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집으로 그냥 돌아오게 됐다.

 

예천에 내려간 아내도 비가 쏟아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라고 전화를 했다. 아이도 얼른 집으로 돌아오라는 카톡 메시지를 보내왔다. 

 

지난주 철물점에서 산 맨홀뚜껑을 끼워 넣고 집으로 돌아왔다. 장맛비가 내리더라도 흙탕물이 맨홀로 떠밀려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지난주에 비해 제법 큰 수박